황정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자신의 멘토링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세상에 수퍼우먼은 없습니다. 일도 잘하고 가정에서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일에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적당히 굴곡을 겪는 것도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 더 관대해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명인들의 베스트셀러에 나올 법한 이 글들은 그러나 ‘평범한’ 직장여성이 또 다른 직장여성들에게 주는 글이다. 글쓴 이는 바로 올해의 여성과기인 멘토 중 한명으로 선정된 황정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세 아이의 엄마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황 선임연구원은 “일과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모든 워킹맘들에게 주어진 과제”라며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다른 한쪽에서 펑크가 날 수도 있다”고 균형감을 잃지 않는 자기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즉, 스스로를 한계로 몰아가는 ‘수퍼맘 콤플렉스’를 버릴 것을 주문한다. 모든 일에 완벽하려 아등바등하지 말고, 중요한 일 시급한 일을 먼저 집중해 처리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맡은 역할이 많은 우리는 좀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며 결연한 다짐과 격려를 잊지 않는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멘토’다.

“재작년 가을 한국천문연구원의 멘토링 사업에 참여할 때만 하더라도 사실 좀 귀찮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어요. 저도 이것 저것 할 일 많은데 다른 사람까지 챙겨야 하니 부담도 적지 않았고요. 하지만 만 2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멘토링을 통해 배운 게 많아요. 한층 성장했다는 느낌도 들고요.”

90년대 TV드라마 ‘카이스트’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었던 황 선임연구원은 2007년 한국천문연구원에 들어와 북극항로 우주방사선 예보 모델을 개발하는 등 활발한 연구 및 사업으로 인정받는 유능한 여성과기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연구실에서 벗어나 멘토링에 참여하자 여기저기서 멘토링을 요청하고 있다. 현재 한국천문연구원 외에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에서 온라인멘토링과 멘토링 레터를 통해 멘토링을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KWSE)가 주최하는 과학탐구교실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가해 월 1~2회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대중강연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처음에는 직장의 가욋일이었던 멘토링이 이제는 그녀의 온오프라인과 SNS, 카카오톡 등 삶의 전 부분에 밀접히 연결돼 있다. 이런 변화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겨져있다.

“지난 3월 직장 내 멘티이자 학교 후배이기도 했던 직원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직장은 직장대로, 육아는 육아대로 너무 힘들었겠다는 것을 그제야 진실로 깨닫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멘토링을 대했지만 그 이후 멘토링을 대하는 시각이 확 달라졌습니다. WISET 멘토링의 경우 온라인이라 조금씩 미루기도 했는데 후배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날 밤 늦게까지 자리에 앉아 멘티에게 답장을 보냈어요. 내 말 한마디가 정말 중요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WISET 멘토링 레터 역시 초기에는 이공계 희망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부나 취업 등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주였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이른바 경력단절과 경력복귀와 관련된 ‘아줌마 멘티’에 대한 멘토링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아줌마 멘티들과는 대화 내용이 많이 달라요. 삶과 육아 등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가 대부분이에요. 제 또래이거나 아니면 더 나이가 많은 이 분들의 고민을 들으며, 저도 심각해질 때가 많습니다. 멘티 중 한 분은 직장 상사가 자신의 공로를 번번히 가로채는 등 비열한 방해를 일삼아 정신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이 분이 받는 부당한 대우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아 멘토 요청을 수락했고, 심각한 고민들과 힘겨운 삶의 무게를 서로 나누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일부에서는 “과학자는 연구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우려의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게의치 않는다.

자신이 존경하는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처럼 대중과 사회와 소통하는 과학자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외부로 알려졌고 지난 15일 ‘여성과학기술인 멘토링의 날’에 경력단절 위기에 처한 동료 및 경력복귀 여성과기인을 위해 적극적인 멘토링을 수행한 공로로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상인 ‘올해의 멘토상’을 수상했다.

“최근 경력 단절·경력복귀 등이 화두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여성과기인이 출산이나 육아 등으로 경력단절 없이 일하고, 또 경력복귀를 성공적으로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제 경우 첫 아이는 박사 후 과정일 때 낳아 저는 일하고 시댁에서 애를 키워주셨어요. 둘째와 셋째를 낳고는 출산휴가만 겨우 썼고요. 출산휴가 중에는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미나나 회의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죠.”

그렇다면 여성과기인들이 경력단절 없이 일하고,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도를 개선하고 어떻게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야할까하는 답변을 기대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책이나 사회문화 등 외적 변수가 아닌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감 같은 내부 요인이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여성과기인이 남성과 같은 성과를 내거나 같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성보다 2~3배의 노력이 필요한 게 현실입니다. 순수하게 일로 평가를 받을 각오를 해야 된다는 거죠. 경력 단절이 있다면 복귀를 위해 쉰 만큼 따라잡는 노력과 자신감, 도전정신을 갖춰야 합니다. 여성대통령 시대라고 여성과기인에 대한 대우가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경력복귀를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나 노력이 중요하다는 황정아 멘토의 말에서 역설적으로 이런 여성과기인들의 자립의지를 더욱 북돋울 정책적 배려와 사회 분위기의 확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라고 강조하는 그녀는 분명 평범한 ‘멘토’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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