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전모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 도중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하여 시해 되었다.



김재규는 1979년 4월경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군부내에 심어 놓은 군맥의 지원을 받아 집권할 것을 구상하고 있던 중 부마(부산, 마산)사태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이때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적기로 판단하였다.


또한,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 한 후 자신의 집권을 지원할 군부내 핵심 인물로서 정승화 총장을 지목하고 있었다.

정승화는 참모총장이 될 때에도 김재규 정보부장의 도움으로 참모총장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러한 평소의 깊은 유대 관계로 정승화 가 동조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정승화의 참여를 전제로 한 ‶3단계 혁명계획〞까지 작성해 놓은 것이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16시경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18시에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과 만찬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재규는 오늘이 지금까지 구상해 놓은 〝3단계 혁명계획〞 을 실행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 하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정승화 참모총장을 내란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16시15분경 정승화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 만찬 장소에서 약50m 떨어진 (옆동 건물) 안가에서 저녁이나 하자고 전하면서 18시 30분까지 오도록 하였다.



김재규는 16시 30분경에 궁정동 안가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으며 김계원 비서실장은 17시 50분경 안가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앉아 대화를 하던 중 김계원 비서실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이 월권을 해서 야단이다.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을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강경하게 몰아간다.” 라고 한탄하자 김재규는

“오늘 저녁 차지철 경호실장을 해치워 버리겠다. 뒷 일은 형님이 책임져 달라. ” 라고 하였으며 김계원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뜻을 표하였다.(수사기록)



18시 05분경, 박 대통령이 안가에 도착하여 김재규 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과 만찬이 시작되었다.



만찬 도중 김재규는 잠시 만찬장을 빠져 나와 정승화가 대기하고 있는 옆 동으로 가서 “대통령과 만찬이 있어서 늦겠다” 고 전하고 만찬이 끝나는 대로 오겠으니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정승화는 이러한 대통령과의 만찬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중 약속을 거절하지도 않고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잠시 후 만찬장으로 돌아온 김재규는 정국상황에 대한 대화 도중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새끼를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라고 한 후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1발 발사하고 이어서 박 대통령에게 1발을 발사하였다. 이때 권총에 이상이 생겨 장전이 되지 않자 밖으로 나와 부하 박선호가 가지고 있던 권총을 받아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와 문갑을 밀고 나오는 차지철을 향해 1발을 추가 발사하고, 1차 총격 부상으로 식탁에 엎드려 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또 다시 머리에 1발을 발사하여 확인 사살 하였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박선호는 김재규의 총성을 신호로 만찬장 옆 대기실에 있던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 외 8명의 경호요원을 모두 사살하였으며, 박상범 경호관 만이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았으나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궁정동 안가에서 40여발의 총성이 울렸으며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그리고 경호관들이 모두 사살 당하는 엄청난 상황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옆 동에 대기하고 있던 정승화 참모총장은 전혀 상황을 모르고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건 직후 김재규는 옆 건물에 대기하고 있던 정승화 총장에게로 달려가

“총장!! 큰일났습니다.” 라고 말하며 대통령이 시해 되었다는 것을 숨기고 정승화 총장을 자기 차에 태우고 육본으로 급히 이동했다.

차안에서 김재규는 정승화 총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 살해된 사실을 알리면서 보안을 지키라고 지시 하였다.




김재규와 정승화는 곧바로 육군본부 벙커로 갔다

대통령을 경호하고 보호해야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참모총장이 범인이 누구인지,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상항 확인도 없이 범인 차에 동승하여 범인 김재규의 요구대로 따르면서 육본에 온 것이다.



◎ 국무위원들의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한 처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정승화 총장과 만찬장을 떠나자 김계원 비서실장은 차량편으로 대통령을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옮겼으며 당직 군의관 송 소령으로부터 이미 사망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청와대로 돌아와 국무총리, 국무위원과 경호실 요원을 비상 소집하였다. 저녁 8시 40분경 비상소집에 따라 청와대에 온 최광수 의전수석 비서관과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각하께서 무슨일이 나서 병원에 계시고 차 실장은 경호실을 지휘할 수 없으니 경거망동하지말고 경호실 병력 출동을 하지 말라“ 고 지시 하였다.

대통령을 경호하고 신변을 보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경호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은 것이다.



8시 50분경 최규하 국무총리가 비서실장실로 달려왔다.


김계원 실장은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움 끝에 각하가 김재규의 잘못 쏜 총에 맞아 서거하셨다.” 라고 완전히 거짓 보고 하였다.

또한, 9시 5분경 청와대에 온 구자춘 내무장관과 김치열 법무장관은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대통령께서 변을 당하셨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실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각하가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물었다.

김계원 실장은 “간신배를 제거한다는 것이 각하께서 다치셨다.”라고 계속 거짓으로 답하였다.

김재규 범인과 뜻을 같이 하겠다는 공범임을 입증하는 발언들이다.



김재규는 10시 30분경, 최규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육군 벙커에 오자 대통령 유고를 비밀에 붙이고 비상계엄을 조속히 선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 시해범인임을 알고 있던 최규하 국무총리와 일부 국무위원은 비겁하게도 김재규가 시해 범인임을 함구 한 채, 김재규의 주장에 동조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위한 국무회의를국방부에서 열었다.



비상 국무회의석상에서 신현확 부총리 등이 김재규의 일방적인 주장에 맞서서 대통령의 사망여부와 그 사유를 국무위원들이 확인 하지도 않았고,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먼 이 시실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반발 하므로써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는 김재규의 의도가 좌절 되었다.

기회주의적인 김계원 비서실장은 김재규의 내란 기도가 실패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박 대통령이 시해 된지 4시간이 지난 10월 26일 23시 40분경에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국방장관에게 비로서 알렸다.



노재현 장관은 정승화 총장에게 즉시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신속하게 범인을 체포하도록 조치여야 할 정승화 총장은 오히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에게 김재규를 연행하여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를 하였다.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을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는 어처구니 없는 지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편, 노재현 장관이 김재규의 체포를 지시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최규하 국무총리는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을 10월 27일 4시를 기해 선포하기로 결정하고 이 사실을 범인 김재규에게 알려주는 어처구니 없는 촌극을 벌리기도 했다.

또한, 정승화가 대통령 시해사건현장에 있었고 범인과 사건에 깊은 관련이 되어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국무위원들이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전담할 합동수사본부장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임명하였다.



◎ 보안사령부의 김재규 체포 및 수사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건 직후 곧바로 육군벙커로 갔다.

그 곳에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군 수뇌부 및 김재규가 함께 있었으나 박 대통령이 서거 하였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박 대통령 서거 진상 확인은 생각 조차 하지않고 있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서거 배경과 범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 등, 석연치 않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보안사령부가 대 전복 차원에서 신속하게 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보안사령관은 즉각 육본 보안부대장실에 임시 수사지휘본부를 설치하고 박 대통령 서거의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 했다.



결국, 보안사령관의 정확한 판단과 순발력에 의해 범인 김재규는 체포 되었고, 합동수사본부의 철저한 수사로 김재규 내란 전모가 밝혀 졌으며, 모든 관련자들은 그 후 재판에 회부되어 김재규를 포함한 박선호, 박흥주 등 중앙정보부 직접 관련자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일부는 구속 되었다.

정승화 총장도 김재규와 저녁 약속이 되어 있어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김재규 수사과정에서 밝혀졌으나, 정승화는 이러한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의 당일 행적과 김재규 범인과 사건에 깊은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국무위원들이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총장을 임명하므로써 합동수사본부에서 정승화를 조사하는데 초기수사단계에서부터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12.12사건이 발생하게 된 단초가 된 것이며, 정승화의 수상한 당일 행적, 김재규 범인과 사건에 관련 여부 등에 대하여는 다음에 12.12사건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필자약력:대불총 상임감사 .전 육본 헌병감.예비역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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