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도통 액션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다. 인터넷을 통해 재미있는 액션 영화를 검색해 보았다. ‘야, 재미 있는 영화들이 참 많구나.’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다. 내친 김에 다섯 편의 영화를 다운 받았다. 뿌듯했다. 그리고, 나는 기어이 앉은 자리에서 다섯 편을 다 보고야 말았다. 너무 재미 있었다. 어제의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불과 하루가 지났는데 어제 본 영화들이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렇게 재미 있게 보았는데 말이다. 일단 어떤 장면이 어떤 영화에서 나온 것인지 분간이 잘 안 된다. 스토리도 뒤엉켜서 헷갈린다. 심지어는 영화 제목이 기억 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뭐, 보는 순간 즐거웠으니 그걸로 만족하자. 보는 동안 재미 있었잖아.’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책도 좋아한다. 자기개발서를 특히 좋아 하는데,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한 가지 테마의 자기개발서 10권을 읽어 버린 적도 있다. 그런데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영화를 보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영화를 볼 때 혹시 일시 정지를 해 놓고 영화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는가? 보통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책을 읽을 때는 어떤 특정한 페이지를 읽다가 잠시 책을 덮고 그 내용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도 하는가? 아마 그러기도 할 것이다. 나는 책을 덮고 깊은 사색에 잠기다가 울컥 치미는 감동을 받기도 한다. 나는 종종 그렇게 책을 본다.

나는 공부도 좋아한다. 솔직히 공부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공부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공부 자체가 목적인 셈이다. 배우는 즐거움은 참으로 큰 것이다. 입시제도를 비롯한 사회적인 여건이 조금만 달라지면 누구라도 공부를 즐길 수 있을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아무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축복받은 일이다. 가식적이라고? 아니다. 난 진실로 그렇게 생각한다.

자, 당신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어떤 문제집을 푼다고 생각해 보자. 영화를 보는 것처럼 공부하는 것이 좋을까? 자기개발서를 읽는 것처럼 공부하는 것이 좋을까? 즉, 스트레이트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한 문제 한 문제 푼 이후에 잠시 정리하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을까?

대부분 전자라고 말한다. 너무나 의외였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 문제 풀기도 바쁜데 언제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요즘 초시계 앞에 놓고 문제 푸는 실태를 모르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명백하게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초시계 앞에 놓고 문제 푸는 아이들 치고 공부 잘하는 아이 단 한 명도 못 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확성이 먼저다. 정확성 없는 스피드는 반드시 큰 후회를 낳는다.

‘공부하는 것 = 문제 푸는 것’ 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공부 잘 하는 것 = 문제 빨리 푸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공부 많이 하는 것 = 문제 많이 푸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 문제를 푼 시간이 의미가 있으려면, 문제를 푼 이후에 그 문제에 대해 정리하고 생각할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관점을 ‘양’ 중심에서 ‘질’ 중심으로 바꾸라는 말이다.

머리에 축적할 데이터의 양에 너무 욕심내지 말자. 데이터들은 분석되어지고 상호연관성 있게 재배열되어 졌을 때 의미가 있다. 그래야 그 데이터들이 상호 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데이터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논리고 추론이고 응용이다. 그런데, 정체 모를 데이터만 잔뜩 쌓여 있다면, 그 데이터들은 상호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니 죽은 데이터가 될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냥 쓰레기일 뿐이다.

어떤 데이터가 나에게 들어 왔으면 내가 지식으로 혹은 지혜로 만들고 소화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 것으로 만들 시간이 있어야 한다. 분석하고 분류되어 잘 저장되어 있다가 정작 내가 필요한 순간 그에 딱 맞는 데이터가 출력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제대로 된 과정 속에서만이 이해력과 사고력과 응용력과 창의력이 생긴다.

하루 종일 문제만 푸는 공부는 마치 하루에 다섯 편의 액션 영화를 본 것과 같다. 도대체 뭘 했는지 조차도 모른다. 물론, 공부 했다는 만족감은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문제를 풀었으니 불안감도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정리도 안 되고 기억도 잘 안 난다. 분명히 공부는 한 것 같은데 머릿속이 어수선하다.

이제 알겠는가? 문제를 많이 푸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루에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해 서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 그 기억은 1년이 넘도록 갈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독서토론회에 참석하여 활발한 토론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 그 기억 또한 1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어떤 동영상에서 한 아이가 인형을 책상 앞에 앉혀 놓고 인형에게 문제 푸는 것을 가르치는 장면을 보았다. 참 좋은 공부법이다. 문제를 풀고 나서, 그 문제를 엄마에게, 동생에게, 그리고 귀여운 곰인형에게 한 번 설명해 보자. 하루에 3문제 정도씩만 이렇게 해 보자. 그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공부를 하게 되고 진정한 실력이 쌓여 갈 것이다.

주변에 이런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열심히 공부하고 문제도 엄청 많이 푸는데 정작 공부는 못 하는 친구 말이다. 그리고 당신이 혹은 당신의 자녀가 이런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엄청난 양의 학원 숙제를 했는데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험 말이다. ‘아! 바로 당신이라고?’

오늘도 엄청난 문제 속에서 사교육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청춘들에게 정말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얘들아, 제발 문제 좀 그만 풀어라!”

글/빈현우 PMC(Postech Math Consulting) 자기주도학습연구소(포스텍자기주도학습관) 소장bin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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