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강릉 대관령 너머길

대관령(8백32미터)은 강릉의 관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릉 땅을 드나들려면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의 구절양장 같은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고갯길의 길이만 해도 13킬로미터에 이른다. 하지만 반듯하고 경사 완만한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 구간을 자동차로 넘을 때에는 고갯길을 지난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속도와 편리함만 강조되는 그 길에서 대관령의 역사적 의의와 오랜 내력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 속도와 편리함을 버리고, 일부러 멀고 불편한 대관령 옛길을 찾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고 있다. 대관령 옛길의 운치와 멋에 흠뻑 매료된 이들은 오랫동안 잊혀지거나 사라졌던 길을 되살리고 이어서 ‘대관령 너머길’을 열었다.

신사임당길을 걷는 도중 만나게 되는 시루봉 솔숲길.
신사임당길을 걷는 도중 만나게 되는 시루봉 솔숲길. '솔향' 강릉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올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새로운 문화생태 탐방로 중 하나로 선정한 대관령 너머길은 강릉 바우길의 2, 3, 10, 11구간을 이어놓은 길이다. 소설가 이순원 씨와 산악인 이기호 씨 등이 주축이 돼 개척한 바우길은 모두 11개 구간에 총길이가 무려 1백62.9킬로미터에 이른다. 그중 대관령 너머길에 포함된 4개 구간의 길이는 총 56.6킬로미터다. 최소한 이틀은 걸어야 할 만큼 긴 여정이다. 게다가 구간마다 독특한 매력과 재미가 있어서 어느 한 구간만 정해서 걷기도 쉽지 않다.

예컨대 ‘대관령 옛길’은 아득한 옛날부터 신사임당,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단원 김홍도 같은 문인과 예술인들이 서울과 강릉 사이를 오갈 때 지나던 역사의 길이다. 옛길의 풍경과 운치가 가장 잘 살아 있어서 경향 각지에서 온 걷기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구간이기도 하다.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은 아름드리 금강소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숲길이다. 옛날부터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은 이곳 소나무들은 궁궐을 짓는 재목으로 쓰였다고 한다.

‘심스테파노길’은 조선 말기의 병인박해 당시 심스테파노라는 천주교 신자가 서울에서 출동한 포졸들에게 잡혀가 순교한 마을을 거쳐 간다.

‘신사임당길’은 사임당 신씨가 어린 아들 율곡을 데리고 서울로 갈 때 지났던 길이다. 특히 이 길은 강릉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인 오죽헌, 선교장, 경포대, 허난설헌 생가 등을 두루 거치는 역사·문화 탐방로다.

옛길의 풍경과 운치 가장 잘 살린 대관령 옛길

이처럼 다양한 특징을 지닌 대관령 너머길의 전 구간을 한꺼번에 모두 걸을 필요는 없다.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한두 구간씩 마음 편히 걷는 게 여행의 즐거움이다.

삼복염천의 무더위 속에서 신사임당길을 걸었다. 대관령 옛길은 이미 서너 차례 걸어봤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은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과 심스테파노길은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 걷는 것이 더 좋을 성싶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신사임당길이 선택됐는데, 솔숲 많은 이 길은 의외로 시원했다.

신사임당길이 시작되는 곳은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촌장제가 유지되는 촌장마을이다. 조선 중기부터 4백40년 동안 이어온 대동계가 여전히 남아 있고, 지금도 매년 설날 위촌리 전통문화전승관에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촌장님에게 합동세배(도배)를 올린다.

촌장마을에서 작은 내를 따라가면 제법 규모가 큰 죽헌저수지의 호반길에 들어선다. 3.5킬로미터가량 이어지는 호반길은 소나무가 울창한 데다 이따금씩 맑은 솔바람이 불어와 한여름에도 걷기 좋다. 하지만 호반길이 끝나는 제방에서 오죽헌까지 1.8킬로미터 구간은 하늘이 훤히 열린 들길이다.

홍련과 배롱나무꽃이 곱게 핀 선교장의 여름 풍경.
홍련과 배롱나무꽃이 곱게 핀 선교장의 여름 풍경.
 
오죽헌(033-640-4457)은 조선 중종 31년(1536년)에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가 친정인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다.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 용꿈을 꾸었다는 몽룡실(夢龍室)도 여기에 있다. 뒤뜰에는 줄기가 검은 오죽(烏竹)이 많아서 오죽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의 주거용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데다 조선 건축양식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라고 해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됐다.

오죽헌 주변에는 2007년에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된 율곡매와 수령 6백 년 된 배롱나무가 서 있다. 둘 다 살아생전의 사임당과 율곡의 모습을 지켜봤을 고목들인데, 한창 절정에 이른 배롱나무꽃은 오죽헌 경내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오죽헌에서 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강릉시 운정동에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양반집이자 가장 큰 개인주택으로 평가되는 선교장(중요민속자료 제5호)이 자리 잡고 있다. 선교장의 주인인 이내번은 평야지대가 없는 강릉에서 만석꾼이라 불릴 정도의 대지주였다. 1703년에 선교장을 처음 지은 그는 우연히 이곳에 천하의 명당을 발견한 뒤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 이후로 가세가 더욱 번창하면서 사랑채인 열화당, 정자인 활래정 등이 중건됐다.

오늘날 줄행랑과 담에 둘러싸인 선교장의 안쪽에는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사당 등이 가지런히 들어서 있다. 바깥쪽에는 ‘ㅁ’자 모양의 방형 연못과 정자까지 갖춰져 있어 조선 상류층 주택의 완벽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그래서 선교장은 사시사철 언제 찾아가도 기품 있고 운치가 넘친다.

매월당기념관엔 김시습 관련 사료·문집 등 전시

오죽헌에서는 여러 명사들의 기문(記文)과 시판(詩板)도 볼 수 있다.
오죽헌에서는 여러 명사들의 기문(記文)과 시판(詩板)도 볼 수 있다.
선교장 옆에는 매월당기념관(033-644-4600)이 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강릉 김씨 집안 사람이어서 이곳에 기념관을 세웠다고 한다. 아담한 규모의 기념관 내에는 김시습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료와 문집 등이 전시돼 있어 지나는 길에 잠시 들러볼 만하다.

매월당기념관을 지나온 신사임당길은 잠시 마을길과 들길을 가로질러 시루봉 능선길로 이어진다. 시종 빼곡한 솔숲 사이로 이어지는 시루봉 능선길은 ‘솔향’ 강릉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낮고 완만한 능선길을 자분자분 걷노라면 그윽한 솔향이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심신의 묵은 때를 깨끗이 씻어주는 듯하다.

시루봉 능선의 솔숲 길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로 이어진다. 경포대는 웅장한 규모의 누각 자체도 볼거리지만, 무엇보다도 경포호 조망이 일품이다. 일찍이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불렸을 만큼 빼어난 풍광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경포대를 내려선 신사임당길은 다시 경포호의 호반길과 연결된다. 원래 12킬로미터에 이르던 경포호의 둘레는 이제 4.3킬로미터로 크게 줄었다. 그중 1.2킬로미터가량을 거쳐가는 신사임당길은 교산교와 난설헌교를 건너 초당마을 솔숲으로 들어선다. 솔숲 한복판에는 조선 최고 여류시인인 난설헌 허초희와 당대의 혁명가이자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 남매의 옛집이 있다.

경상감사를 지낸 허엽의 작은딸로 태어난 난설헌은 어려서부터 예쁘고 총명했던 데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15세 때 혼인한 뒤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다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난설헌이 태어나고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터에 들어선 이 집은 근래 깔끔하게 단장됐다. 한동안 사람의 온기가 끊겼던 사랑채는 이제 난설헌차방으로 꾸며져 간간이 찾아오는 이들의 쉼터가 됐다. 집 주변에는 허난설헌기념관, 문학공원, 허씨 5대 문장가들의 시비 등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아름드리 솔숲이다. 소나무와 솔숲이 지천인 강릉에서도 초당마을의 이 솔숲은 최고의 마을숲으로 꼽힌다. 숲 바닥에 대자리를 깔아놓고 온종일 뒹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청신한 솔바람과 그윽한 솔향기에 매료된 나그네는 차마 발길을 되돌리지 못한 채 한동안 초당마을 솔숲을 서성거려야 했다.

오죽헌 내 강릉시립박물관 체험실에서 전통공예품을 만드는 어린이들.
오죽헌 내 강릉시립박물관 체험실에서 전통공예품을 만드는 어린이들.
 

 
코스 정보
대관령 옛길 16.2km(5~6시간)
옛 영동고속도로(상행선) 대관령휴게소 → 선자령 등산로 입구 → 양떼목장 옆길 → 풍해조림지 → 대관령 국사성황당 → 반정 → 주막 → 대관령 자연휴양림 입구 삼거리 → 어흘리 → 보광리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 13km(5~6시간)
보광리 → 보현사 앞 임도 갈림길 → 어명정 → 술잔바위 → 송이 움막 → 임도 삼거리 → 명주군왕릉
심스테파노길 11km(5시간)
명주군왕릉 → 무일동 → 멍에재 → 경암동 골아우(심스테파노마을) → 위촌리 촌장마을 → 촌장마을 전통문화전승관
신사임당길 16.4km(6시간)
촌장마을 전통문화전승관 → 죽헌저수지(지변지) → 오죽헌 → 선교장 → 시루봉 솔숲길 → 경포대 → 경포 호반길 → 허균·허난설헌 생가
*문의·바우길│www.baugil.org 탐사대장│010-9244-5995

숙박
선교장(033-646-3270)에서도 숙박을 할 수 있다. 방의 크기와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한 칸에 2명씩 총 4명이 묵을 수 있는 2칸짜리 방 하나의 숙박료는 5만원. 경포대 부근의 울창한 솔숲에 둘러싸인 객주휴심(033-642-5075)은 통나무와 황토로 지어진 전통한옥펜션이다. 경포해수욕장 주변에는 현대호텔경포대(033-651-2233), 경포비치르호텔(033-643-6699), MGM호텔(033-644-2559), 경포수모텔(033-644-1239), 경포솔숲으로펜션(033-643-4900), 경포발리펜션(033-644-4439), 씨에스타펜션텔(033-651-4475) 등 다양한 종류의 숙박업소가 몰려 있다.

맛집
선교장 인근 서지마을의 서지초가뜰(033-646-4430)은 창녕 조씨 종가의 전통음식과 옛날 농가음식을 재현한 한정식을 내놓는다. 선교장 내의 연(033-648-5307)도 가승(家乘)음식을 한정식으로 차려낸다. 허난설헌 생가가 자리한 초당두부마을에는 초당할머니순두부(033-652-2058), 토담순두부(033-652-0336), 그옛날초당순두부(033-653-1547) 등과 같이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해 담백하고 고소한 초당두부를 만드는 두부 전문점들이 20곳 넘게 성업 중이다. 위촌리 촌장마을에 위치한 위촌리전통한우(033-643-6928)에서는 한우 암소의 여러 부위를 비교적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가는 길
승용차 승용차 동해고속도로 강릉나들목 → 강릉요금소 통과하자마자 한국도로공사 강릉지사 방면으로 우회전 → 도로공사 강릉지사 방면으로 좌회전 → 위촌마을 전통문화전승관(대관령 너머길 4구간의 시점·강릉요금소에서 1.37킬로미터 거리)
대중교통 서울 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강릉행 고속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출발. 강릉시외고속터미널까지는 약 2시간 20분 소요. 강릉시외고속터미널 앞에서 대관령 너머길 4코스의 시점인 위촌리로 가려면 512, 521-1번 시내버스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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