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 특별기획] ‘폐허를 딛고 세계 중심국으로’

[인터뷰] 윤병국 대한학도의병동지회 회장
 
60년 전 사지를 헤매던 열 아홉 소년은 백발 노인으로 바뀌었지만, 전쟁의 기억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참혹한 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남은 삶은 ‘덤’이라며 제 2의 인생을 살았다는 윤병국(79) 대한학도의병동지회장.

낡고 조그마한 그의 집 현관문에는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푸른색 푯말이 선명했다. 지난주 경기도 고양시의 윤 회장의 집에서 그를 만나, 6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윤병국 회장의 국가유공자 증서
윤병국 회장의 국가유공자 증서.
 
■ 잊을 수 없는 1950년 8월 포항의 밤

1950년 여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북한군의 공세에 대한민국 국군은 전쟁 두 달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서울에서 대전, 대구, 부산으로 수도를 옮겨간 정부는 8월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편성해, 사활을 건 방어전에 나섰다.

서울 경신중 6년생 윤병국(당시 19세)도 국군을 따라 서울에서 충북 증평을 거쳐 대구로 피난갔다. 피란지 대구에서 ‘전장에 나가 싸우자’는 김석원 수도사단장의 격문을 보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했다.

백인엽 대령의 부대 편성에 맞춰 경북 의성군에 남은 학도병 부대는 8월 10일 포항으로 이동해, 곧바로 전장에 배치됐다. 책을 버리고 총을 든 학도병들은 포항을 수중에 넣으려는 인민군에 맞서 맹렬히 싸웠다.
학도병들은 총을 처음 잡아봤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 전투는 11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70여 명 중 11명만 살아남았다.

장병들이 6.25당시 포항 전투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장병들이 6.25당시 포항 전투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소년 윤병국도 북한군에 맞서 M1 소총을 들고 동료와 함께 싸웠지만 북한군을 막지 못했다. 동료들은 하나 둘 쓰러져 갔고, 어느새 윤병국만 남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돌아서는 순간, 진지에 떨어진 수류탄이 뒤에서 폭발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팔과 다리에 쇠파이프로 맞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윤병국은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을 딛었지만 파편을 맞은 다리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땅을 밟지 못했다.

윤병국은 급한대로 근처 콩밭에 몸을 숨겼다. 인민군이 콩밭을 뒤졌다. 살아남은 몇 안되는 동료 중 작은 소리라도 내거나, 움직이는 동료들은 순식간에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윤병국은 ‘나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았고, 요행히 인민군의 수색을 피했다.

날이 밝자 윤병국은 남으로 내려갔다. 피를 흘리고, 먹지도 못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얼마 쯤 갔을까? 얼굴이 시커먼 군인이 보였다. 미군이었다.
윤병국을 발견한 미군은 적으로 오인해 사격을 했다. 놀란 윤병국이 “I am South Korean!”이라고 소리쳤다.
윤병국의 외침을 듣고 미군 중사가 교복을 입은 윤병국에게 연락병(통역병)을 대동하고 왔다. 윤병국은 부대 막사로 옮겨져 신원 확인 절차를 밟았다.

미군은 윤병국이 포항 전투에서 살아남은 학도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윤병국을 곧바로 울산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했다. 윤병국은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병상에서 한 달 반을 지낸 뒤 퇴원했다.

윤병국이 퇴원할 무렵 전세는 역전됐다. 국군은 북진했고, 윤병국도 다시 군에 돌아가 정훈부대에서 활약했다. 필력이 좋았던 윤병국의 글은 전장의 군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당시 부산일보는 윤병국의 글을 지면에 싣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신분인 윤병국은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학도병 복귀 명령에 따라 학교로 돌아왔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윤병국은 남은 인생을 제 2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충남 서산군)에 돌아가, 지역 발전에 헌신했으며, 서울로 와서도 살아남은 전우들과 함께 학도의병의 명예회복에 힘썼다.

군번이 없는 학도병들은 얼마전까지도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참전했다는 증거(전투에 같이 참여한 동료의 확약서, 전투 중 치료받은 기록 등)가 있으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길이 열렸다. 윤병국도 2003년에야 행정소송을 거쳐 대한민국의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윤병국 회장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뒤 받은 훈장
윤병국 회장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뒤 받은 훈장.
 
■ 제2의 인생, 동료의 명예회복은 지금도 진행형

- 전후 삶이 덤이라고 했는데요.
“포항에서 죽을 뻔하다 살아난뒤, 남은 인생은 제 2의 인생이라 생각하고 살았어요. 결혼해서 5남매를 기르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가게 한 것은 물론 없고, 도움받고 산 적도 없죠. 오히려 도우면 도왔지. 이제는 얼마 안 남은 살아남은 전우를 위해 남은 인생을 다 쏟고 있습니다.”

- 학도병에 자원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없어질 뻔한 대한민국이 누구 때문에 살아남은 건가요? 우리 같이 목숨던져 지킨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야. 당시 유복했던 우리 집안에서도 나의 입대를 극구 말렸어요. 그래도 총을 든 것은 나라를 구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발로했기 때문이에요.”

- 최근에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학도병은 군번이 없다해서 국가유공자 대우를 못 받았어요. 나 역시 50년 넘게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지요. 너무도 억울해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탄원을 계속했어요.(윤 회장은 행정소송을 통해 2003년에야 국가유공자로 인정 받았다) 죽을 날이 머잖은 동료가 적지 않지만, 지금도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유공자 대우를 못 받는 사람이 있어요. 반면, 유공자가 아닌 사람이 유공자인 척 하는 사기유공자도 있고. 국가가 여전히 할 일이 많은데….”

- 학도병이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을 때는 언제인가요?
“몇해 전 미국에 갔을 때에요.(윤 회장의 장녀는 미국에 거주한다) 음식점에 갔는데 종업원이 내 ‘상이군경증’을 보더니, 쏜살 같이 주인에게 가서 얘길 하더군요. 잠시 뒤 주인이 와인을 들고 파티상을 차려 왔어요. 알고보니 음식점 주인의 할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였대요.
참전용사 파티가 즉석에서 열렸지요. 음식점의 다른 손님도 저를 축하해 주고요. 식당 주인은 다른 손님에게 ‘나의 할아버지와 같이 전장에서 싸운 용사’라고 나를 소개했어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반대에요. 참전용사 모자를 쓰고 거리에 나서면, 소 닭보듯 합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인사는커녕 자리 양보하는 젊은이도 보기 힘들어요. 오히려 저 사람 뭐냐? 하는 수군거림도 듣고요. 조국을 지킨 용사들이 조국보다 미국에서 더 대우받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윤 회장의 상이군경증
윤 회장의 상이군경회원증.
 
■ 지금은 평시가 아닌 전시, 한반도 현실 직시해야

- 요즈음 젊은 세대의 안보관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호국, 안보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아요.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지요. 민주화보다 안보가 먼저지만, 과거 우리 정부는 민주화를 더 앞세운 측면이 많았아요. 나라가 있어야 민주화도 있는 것인데.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제대로된 나라를 만들기 어렵다고 봅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요즈음 젊은이들을 보면 개탄스러울 때가 많아요. 심지어 우리나라 군대를 이끌어갈 사람들이라고 하는 육군사관학교 일부 생도들 조차 주적개념이 의심스럽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어요. 일반 병이나 젊은이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이런 젊은이들이 제대할 무렵이 되면 95%는 주적개념을 만들고 사회에 나온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윤병국 대한학도의병동지회장
윤병국 대한학도의병동지회장.
 
- 군대가 안보관 형성에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현장에 가 보니 생각이 달라지는 거지요. 전쟁을 굳이 겪지 않고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달라지는데, 전쟁을 겪은 우리 세대는 오죽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손가락질하는 젊은이들도 있지만, 그들도 군대를 다녀오고, 남북 간 긴장된 대치상황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봐요.”

- 젊은 세대나 대다수 국민들은 평화로운 한반도를 원하지 않습니까?
“헌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한반도는 지금도 전시 상황입니다. 정전은 잠시 전쟁을 멈춘 것이지, 끝난 것이 아니에요. 북한과 정전협정은 언제든 깨질 수 있어요. 천안함 피격 사건을 보세요. 우리 영해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 말이에요? 그것이 지금 한반도의 현실입니다.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평화 운운해요. 그러나 지금은 결코 평화시기가 아닙니다. 전시에요.”

- 월드컵입니다. 축구에 열광하는 젊은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젊음은 좋지요. 젊으니까 광장에서 그리 응원하는 것 아닌가요? 저도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에 앞서 나라라는 것이 가슴에서 무엇을 꿈틀대게 합니다. 지금 젊은이들도 그것은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 적지 않은 나이에 학도의병동지회를 이끄는 일이 벅차지 않은세요?
“내가 눈 감기 전에 할 일이 있어요. 아직도 찾지 못한 나와 동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2008년에 동지회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고요. 내 몸이 성치 않지만(윤 회장은 다리 한 곳을 빼고 온 몸에 파편이 박혀 성한 곳이 없다),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참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명예를 찾을 수 있다면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에요.”

지금은 평시가 아니라 전시임을 강조하는 윤병국 회장
지금은 평시가 아님을 강조하는 윤병국 회장.
 
- 정부에서 동지회를 위해 무엇을 지원해 주나요?
“월 9만 원인가를 유공자 수당으로 받고 있는데, 전화비는 월 9만 원이 보통이라 남는게 없어요. 그래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전우의 명예회복을 하는 길이기에 기꺼이 합니다.

청와대는 물론이고 교육과학기술부에도 우리 전우들이 싸운 내용을 알렸어요. 우리 목적은 교과서에 학도병 내용이 실려서 자라나는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조국을 위해 희생했던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교과부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해요.

행정안전부에는 우리 회를 비영리단체로 인정해 달라는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행안부의 인정을 받으면 정부 지원 단체로 약간의 보조금 등 혜택이 있어요. 민주화 단체도 지원해 주는 마당에 조국을 위해 피흘린 우리 단체를 간과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윤병국 옹이 2008년 학도의병동지회를 만든 것도 본인처럼 명예회복을 못하고 억울한 세월을 살아야 했던 학도의병동지들을 위해서였다. 학도병은 과거 의용군(義勇軍)으로 불렸지만 윤병국은 학도병은 “조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므로 조선시대 의병과 같이 義兵으로 불려야 한다”며 이름도 ‘학도의병동지회’로 바꿨다.

올해 80세인 윤 회장은 의병동지회의 사무를 본인이 직접 처리하고 있다. 윤 회장의 서재에는 동지회 업무를 처리하는 컴퓨터와 윤 회장의 돋보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윤병국 회장의 업무 컴퓨터와 돋보기
윤병국 회장의 업무 컴퓨터와 돋보기.
 
- 60주년이라 그런지 올해는 6.25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 현충원에 갔더니, 유치원생들이 잔뜩 왔더군요.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전쟁 관련 얘기를 해 달라고 간곡히 청해서 애들과 얘기를 나눴어요. 꼬마들에게 6.25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두 세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기특한 생각이 들어 열심히 설명해 줬어요.
자라나는 세대가 전쟁을 기억하고, 우리같은 늙은이의 희생을 기억해 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요.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겠지만,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평화는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키는 것’이라는 말을 국민 모두가 잘 기억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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