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 위대한 사회

인간은 자연을 향해 늘 ‘위대(偉大)하다’고 말해 왔고, 또 앞으로도 이 말을 계속 사용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이 생존하는 법이나 자연의 창조력에 대한 경이로움, 그리고 자연계의 ‘장엄한 현상들’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늘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의 신관을 형성시킨 자연물이나 자연현상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의 지혜에 기초한 (과학)기술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자신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현상에 대해 막연한 신비주의를 넘어 그 생성원리까지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이행했다.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인간의 경우 생채지도인 ‘게놈’을 완독함으로서 복제인간을 만드는데에도 공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써 자연과 함께 정작 더 위대(偉大)해진 것은 인간, 곧 사회다.

이처럼 이간이 자연 현상의 원리를 규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생존을 위해 사용했던 ‘원초적 도구’와 인간의 지혜가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도구적 인간, 즉 인간의 생활을 변모시킨 직접적 동기는 도구 사용법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이것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도구와 새로운 지식들, 그리고 이 지식의 누적적 결과에 의해 체계화된 기술, 곧 과학기술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 과학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위상(位相) 짓는 등 양측 모두에게 큰 변화를 부르고 있다.
물론 이 변화에는 상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내재되어 있다. 향후 우리는 이 ‘변화의 내용’에 대해 매우 깊은 고찰이 필요하고, 인간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성찰 또한 필요하다. 인간 활동의 역작용들과 순기능에 대한 고려로서 제 환경적 변화들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의 필요성, 예를 들어 기후변화의 변제 등.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차후로 미룬다.

아무튼 이후 인간 삶의 누적적 결과인 역사와 과학기술은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 결과 인간과 함께 사회 또한 위대해졌다. 이처럼 ‘인간, 곧 사회가 위대하다’는 것을 인간이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랜 전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신반의하는 등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자연과 함께 인간이 더 위대하다’는 내 말이 역설(逆說)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연을 지켜내는 방법까지 생각하는 발전 단계에까지 진입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앞서 내가 한 말이 결코 역설이 아님을 누구나 인정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즉 생태계의 경쟁적 실상을 충분히 알게 되면, 그리고 그러한 경쟁을 극복하고 공존을 실천해가는 사회를 발견하게 되면, 모두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앞서 행한 나의 표현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자연 질서의 냉혹함은 패자에게는 도태를 통한 존재 자체의 소멸을, 이 얼마나 처참하고 슬픈 일인가!, 승자에게는 번식을 통한 지배의 기회를 강렬하게 제공한다.

이처럼 자연은 항시 패자에게 결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사회는 패자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등 기회의 연속을 보장한다. 이 점이 앞서 말한 인간, 곧 사회의 위대함이다.

물론 자연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질서의 능력(자기조절 기능)’을 지녔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지켜내기 위해 자연은 또 끊임 없이 순환한다. 이 자연 순환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이 과정에 자연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갖는다. 과연 나의 이 같은 생각이 옳을까? 즉 자연도 간혹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앞서 내가 말한 것은 인간 삶의 모습 즉 사회상을 자연에 투영한 까닭이다. 이로써 우리는 자연도 역시 그럴 수도 있게거니 하는 추정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추정을 정당한 것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려는 인간주의 때문이며, 인간 역시 자연의 주체로서 또한 객체이기 때문에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런 우리의 생각은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인간행위의 일단이지 자연(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인간 사고의 산물이며, 또한 사회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으로서 인간 지혜의 산물이다. 물론 이것은 편의주의(便宜主義)와는 다르다.

한편 우리는 인간이 가진 지혜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이 바로 인간 즉 사회를 위대하게 하는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자기복제’라는 절대적 순환과정 속에 있다. 물론 이 순환과정은 확장적인 것과 그 ‘반대인 경우(앞서 말한 도태)’도 있다. 다만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이것은, 설령 그 행위가 대를 잇는다는 이기심에 바탕을 두고 있더라도, 배려 곧 자기희생의 결과라는 점이다. ‘자연과 함께 인간이 더 위대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유대를 통해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한다. 이 유대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앞서 말한 ‘자기희생’이며, 스스로에 대한 배려다. 사회가 존립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앞서 말한 점 때문이다. 이 점 으로 인해 사회는 패자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다. 패자의 부활 이것은 분명 자연현상으로부터 이탈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회적 힘의 원천이다. 아울러 민주주의 근간이기도 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 곧 사회의 위대함은 바로 사회적 유대에 있다. 위대한 자연과 더불어 정작 사회가 더 위대한 바로 사회에서는 패자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 즉 사회적 유대 때문이다.

2009.7.
저작권자 © 뉴스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