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환 상지영서대학 교수(ICOMOS 한국위원)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는 한국이 석굴암, 불국사, 종묘 등에 이어 9번째 세계문화유산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한 왕조의 사후 공간 전체가 같은 날 한꺼번에 등재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남다르다. 세계문화유산 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다.

사실 지난 2006년까지만 해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머리를 맞댄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는 선·정릉과 같이 훼손이 많은 몇 기의 능은 제외하고 덜 훼손된 능부터 먼저 등재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다른 주변 국가들도 연차적인 등재를 선호해왔던 터였다.

그러나 국제 학자들은 빌딩 숲에 쌓여있는 선·정릉을 보면서 그간의 강한 개발 압력 속에서도 어렵사리 보존해온 우리의 노력을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며, ‘이것이 세계유산감’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선·정릉은 무역센터와 첨단산업업체 등의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 하나의 섬처럼 자리잡고있다. 물론 그 덕에 능을 찾는 외국인들의 수도 많은 편이다.

당시 실사자 신분으로 서울을 방문한 중국의 왕리준(王力軍)은 열흘간의 꽉 짜인 일정 속에서도 선·정릉을 다시 보기를 원한다며 우리의 발길을 돌리게 했고, 선·정릉에 도착한 후에는 능역의 외곽을 뛰어다니며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바람에 필자는 예정에 없던 구보를 해야만 했다. 그만큼 그는 선·정릉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또 우리 능에 숨겨진 스토리텔링에 주목했다. 특히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을 답사하면서 우리가 들려준 ‘단종애사’를 듣고 난 후 단종의 애틋함이 배어있는 장릉에 더 큰 관심과 애정을 나타냈다. 참고로, 조선왕릉 42기는 모두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유네스코는 심사보고서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40기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40기

필자는 지난 2004년 가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에 대해 연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다소 암담한 마음이 앞섰다. 특히 40기나 되는 왕릉을 한꺼번에 등재한다는 유래없는 시도라서 더욱 고민이 깊었다. 519년의 긴 역사와 수천 제곱미터의 넓은 면적에서 어떻게 세계유산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러나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그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주변국인 중국, 일본 등과 비교할 때 우리 민족의 자연관이 탁월함은 물론 보편적 가치를 지니기에도 충분하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5년 문화재청에서는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 잠정 등재에 등록했다. 그리고 2006년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한국위원회가 문화재청의 의뢰를 받아 ‘조선왕릉(능원53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학술용역을 진행한 후 2008년 1월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국내학술대회와 두 차례에 걸친 국제학술대회 등은 물론 베트남 중국 등을 방문해 이미 등재된 외국의 능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세계는 ‘문화전쟁’중이라는 말이 피부에 와닿았다. 베트남 답사에서는 인위적인 조영의 모습을, 중국 답에서는 웅장함과 거대한 조영의 미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을 답사할 때 만난 한 책임 있는 능원의 관리는 ‘중국의 능원은 조성한 다음 날부터 도굴범과의 전쟁’이라는 말을 들려줬다. 그의 말을 우리 능에 역으로 대입해보면 우리의 보존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왕릉 능침은 임란 직전 일본군에 의해 도굴 당한 선·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인의 눈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 가치는 두세 배 이상 빛을 발했다. 지난 6월 말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협약정부간위원회에서 평가기관인 ICOMOS에 의해 ‘등재권고’라는 호평을 받아 단 15분 만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어낸 것은 우리 능의 우수성이 그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선·정릉
서울 선·정릉에서 시민들이 주말을 즐기는 모습

우리 민족은 조선왕릉과 같은 사후의 공간을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의 공간으로 조성해왔다. 즉 선왕은 속세에서의 피곤함을 잊고 편안히 쉬는 공간으로, 현세의 왕은 선대왕의 선정을 본받는 공간으로 조영했다. 외국처럼 죽은 왕이 통치하는 개념으로 만든 공간이 아니라 후손을 배려한 정원 같은 개념이다.

어릴 적 누구나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서 한번쯤 왕릉을 둘러봤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덤문화를 ‘흉례의 공간’이라기보다 소풍을 가서 즐기는 ‘길례의 공간’으로 꾸몄던 우리 조상의 지혜가 어려 있다.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우리문화의 가치와 조상의 지혜를 다시금 되새겨 볼 때이다.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는 한국이 석굴암, 불국사, 종묘 등에 이어 9번째 세계문화유산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한 왕조의 사후 공간 전체가 같은 날 한꺼번에 등재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남다르다. 세계문화유산 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다. 사실 지난 2006년까지만 해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머리를 맞댄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는 선·정릉과 같이 훼손이 많은 몇 기의 능은 제외하고 덜 훼손된 능부터 먼저 등재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다른 주변 국가들도 연차적인 등재를 선호해왔던 터였다.그러나 국제 학자들은 빌딩 숲에 쌓여있는 선·정릉을 보면서 그간의 강한 개발 압력 속에서도 어렵사리 보존해온 우리의 노력을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며, ‘이것이 세계유산감’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선·정릉은 무역센터와 첨단산업업체 등의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 하나의 섬처럼 자리잡고있다. 물론 그 덕에 능을 찾는 외국인들의 수도 많은 편이다. 당시 실사자 신분으로 서울을 방문한 중국의 왕리준(王力軍)은 열흘간의 꽉 짜인 일정 속에서도 선·정릉을 다시 보기를 원한다며 우리의 발길을 돌리게 했고, 선·정릉에 도착한 후에는 능역의 외곽을 뛰어다니며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바람에 필자는 예정에 없던 구보를 해야만 했다. 그만큼 그는 선·정릉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또 우리 능에 숨겨진 스토리텔링에 주목했다. 특히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을 답사하면서 우리가 들려준 ‘단종애사’를 듣고 난 후 단종의 애틋함이 배어있는 장릉에 더 큰 관심과 애정을 나타냈다. 참고로, 조선왕릉 42기는 모두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유네스코는 심사보고서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필자는 지난 2004년 가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에 대해 연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다소 암담한 마음이 앞섰다. 특히 40기나 되는 왕릉을 한꺼번에 등재한다는 유래없는 시도라서 더욱 고민이 깊었다. 519년의 긴 역사와 수천 제곱미터의 넓은 면적에서 어떻게 세계유산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러나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그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주변국인 중국, 일본 등과 비교할 때 우리 민족의 자연관이 탁월함은 물론 보편적 가치를 지니기에도 충분하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5년 문화재청에서는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 잠정 등재에 등록했다. 그리고 2006년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한국위원회가 문화재청의 의뢰를 받아 ‘조선왕릉(능원53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학술용역을 진행한 후 2008년 1월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국내학술대회와 두 차례에 걸친 국제학술대회 등은 물론 베트남 중국 등을 방문해 이미 등재된 외국의 능역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세계는 ‘문화전쟁’중이라는 말이 피부에 와닿았다. 베트남 답사에서는 인위적인 조영의 모습을, 중국 답에서는 웅장함과 거대한 조영의 미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을 답사할 때 만난 한 책임 있는 능원의 관리는 ‘중국의 능원은 조성한 다음 날부터 도굴범과의 전쟁’이라는 말을 들려줬다. 그의 말을 우리 능에 역으로 대입해보면 우리의 보존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왕릉 능침은 임란 직전 일본군에 의해 도굴 당한 선·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온전한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국내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인의 눈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 가치는 두세 배 이상 빛을 발했다. 지난 6월 말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협약정부간위원회에서 평가기관인 ICOMOS에 의해 ‘등재권고’라는 호평을 받아 단 15분 만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어낸 것은 우리 능의 우수성이 그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우리 민족은 조선왕릉과 같은 사후의 공간을 죽은 자와 산 자의 만남의 공간으로 조성해왔다. 즉 선왕은 속세에서의 피곤함을 잊고 편안히 쉬는 공간으로, 현세의 왕은 선대왕의 선정을 본받는 공간으로 조영했다. 외국처럼 죽은 왕이 통치하는 개념으로 만든 공간이 아니라 후손을 배려한 정원 같은 개념이다. 어릴 적 누구나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서 한번쯤 왕릉을 둘러봤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덤문화를 ‘흉례의 공간’이라기보다 소풍을 가서 즐기는 ‘길례의 공간’으로 꾸몄던 우리 조상의 지혜가 어려 있다.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우리문화의 가치와 조상의 지혜를 다시금 되새겨 볼 때이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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