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봉 국민대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뉴스데일리]‘장미대선’이라 했다. 아침에 길을 나서며 옆집 담장에 핀 붉은 넝쿨장미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 보인다. 1번을 찍은 사람도, 2번을 찍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권력의 출발점인 국민 다수의 뜻은 새로운 리더십을 탄생시켰다. 참 길고 험난했다. 모두가 안개 자욱한 터널의 끝을 막 빠져나온 느낌이다.

조간신문을 펼쳤다. 신문에서는 대사건이 터졌을 때 1면 전체를 큰 활자로 가로지르는 제목을 단다. 보통 통단 컷이라고 부른다. 1년에 몇 번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광화문 촛불집회가 시작된 작년 가을 이후 탄핵된 대통령이 구속될 때까지 최소한 대여섯 번 이상은 봤던 거 같다.

5월 10일자 모든 신문도 예외 없이 통단 컷이다. 제목을 본다. ‘문재인 대통령, 10년 만의 정권교체’ ‘문재인 당선, 통합 대통령 되겠다’ ‘개혁과 통합, 새 대한민국 문을 열다’ ‘문재인,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제목들이 보인다.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당선자가 전날 밤 광화문에서 한 연설에서 따왔거나 역사적 의미를 부각한 것들이다.  

그런데 눈길을 끈 컷이 있었다. ‘대통령 문재인’ 또는 ‘19대 대통령 문재인’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이었다. 두 신문이 그렇게 편집했다. 아무런 수식이 없다. 글자 수가 적다 보니 지면에 여백마저 생겼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언론계에 오래 있었지만 처음 보는 컷이다. 누구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걸 아는데, 왜 굳이 이름 석 자만을 덩그러니 제목으로 달았을까.

정권교체에 방점을 찍은 것일까.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무게감이자 요구일 것이다. 편집자는 문재인 이름 석 자가 짊어진 시대적 무게, 또 그 이름이 요구받는 역사적 소명을 굳이 발설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둔 거라고 나름으로 해석했다. 때론 침묵이 더 강한 메시지를 주는 법이다. 그중 한 신문은 당선자의 사진도 쓰지 않았다. 대신 캐리커처를 그리고 그 배경에 후보를 낸 5개 정당의 상징색을 국기처럼 깔았다. 설명을 안 붙여도 안다. 포용하고 통합하라는 주문이다.

사설을 봤다. 거의 모든 신문의 사설 제목에 등장한 단어는 통합과 협치였다. ‘통합과 협치 불가피하다’ ‘국민은 협치와 통합을 요구한다’라는 제목이 보인다. 어느 신문은 ‘새 대통령의 담대한 리더십을 기대한다’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결론은 통합에 대한 요구였다.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문재인이 10일 집무를 시작했다. 모든 국민이, 모든 언론이 국민통합과 정치권의 협치를 입을 모아 말한다. 문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2017년 5월 10일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나라다운 나라, 누구나 다 인간답게 사는 나라, 통합과 협치, 재조산하(再造山河)는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준엄한 시대적 소명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도 말했듯이 그것은 단기간에 이뤄지긴 힘들다. 이상은 장대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2위와의 격차가 가장 큰 대선 결과였다지만 국민 절반 이상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정당이, 유권자가, 언론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 선진국은 지구상에 없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기실 그 편파 때문에 발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첫날부터 대통령의 작은 변화를 확실히 보았다. 그는 홍은동의 검소한 자택을 나오면서부터 후보 시절 경호했던 경찰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국회에서 외국 경축사절도, 예포 발사도 없는 약식 취임식을 마치고 청와대로 이동하는 꽤 긴 시간 내내 전용차의 지붕을 열고 일어서서 시민들에게 계속 손을 흔들었다. 전용차는 서행했다. 연도에 몰려나온 시민들도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 즐거워하며 인증샷을 했다. 각본에 없던 행동이라는 기자의 해설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경호팀에서는 매우 긴장했을 것이다. 퍼스트 레이디의 모습도 그 전과는 달라 보였다. 행동은 발랄했고 표정은 숨기지 않았다. 부부는 다정해 보였다.

문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나선 첫 공식 일정은 총리와 국정원장, 비서실장 인선을 발표하는 회견이었다. 깜짝 놀랐다. 백악관에서나 보던 장면이다. 대통령이 그들을 대동하고 춘추관(청와대 기자실)에 와서 인선 배경을 직접 국민에게 밝힌 것이다. 기자들이 마음껏 내정자들에게 질문하도록 한 데 한 번 더 놀랐다.

전임 대통령은 춘추관에 몇 번이나 왔던가. 아주 드물게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우리는 그 익숙한 풍경을 기억한다. 청와대 수석과 국무위원들을 허수아비처럼 도열시키고 발표문을 읽고는 질문도 받지 않고 퇴장하던 모습. 언론도 한 사람만을 위한 액세서리였을 뿐이다.

나는 문 대통령이 보여준 이 작은 변화가 그래서 정말 반갑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문 대통령도 취임사 첫 부분에서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다”고 말했다.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정책적 약속에 앞서 이걸 먼저 강조한 게 마음에 들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문 대통령이 내세운 국민통합이란 결국은 이런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통합은 소통에서 시작된다. 국민에게 손을 흔들지 않는 리더는, 침묵하는 리더는, 경청하지 않는 리더는, 상대방과 대화하지 않는 리더는 결코 통합을 말할 수도, 이룰 수도 없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보다 국민들이 사랑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길 바란다. 어느 선진국에서든 모든 면에서 성공했다는 대통령은 없다. 다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역사는 성공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존경과 사람을 받은 대통령을 기억한다. 취임사에서처럼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어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국민의 자랑으로 남는” 대통령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대통령의 24시간이 집무이며, 대통령이 있는 곳이 바로 집무실이라는 말은 더 듣고 싶지 않다. 대통령도 출퇴근을 하고 퇴근 시간에 남대문시장 포장마차에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퍼스트 레이디가 동네 슈퍼에서 저녁 찬거리를 사고 줄을 서서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자기 지갑을 열어 옷을 사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더 이상 적자생존(적어야 산다)하는 초등학교 받아쓰기 교실 같은 국무회의 장면은 보고 싶지 않다. 지시만 있고 토론은 없는 수석비서관 회의도 보고 싶지 않다. 각료나 참모가 대통령을 면담하는 게 연중행사가 아니길 바란다. 춘추관에서 대변인의 대독만 있는 대국민 발표는 듣고 싶지 않다. 대통령이 그날 만나는 사람과 행선지가 분 단위로 언론에 매일 보도되길 바란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등산을 하고, 요란 떨지 않고 음악회 전시회에 가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보통사람처럼 가족과 휴식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빵과 장미를 다 소중히 여기는 대통령을 원한다. 인문학적 소양과 철학을 지닌 대통령이 그립다. 언론으로부터 도움받을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언론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기자의 질문은 국민에게 위탁받은 권리임을 이해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누가 봐도 서민 코스프레나 정교한 이미지 마케팅이 아닌, 내면의 진정함에서 우러나오고 있음이 느껴지는 대통령이길 바란다. 그런 대통령 문화가 정착돼 더 이상 그런 모습이 뉴스가 되지 않길 바란다. 리더십은 발코니에 있지 않고 플로어에 있다. 그곳이 새 리더십이 서야 할 자리다.

필자:한기봉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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