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 너 때문에 죽겠다! 진짜 뭐가 되려고 그러니! 너 인생 꾸리꾸리하게 살 거야?” 소년은 의기소침해진다.
급기야 어머니는 아이를 1등으로 만들어 줄 수영 코치를 데려온다. 광수(박해준)는 한때 잘 나가던 국가대표 수영선수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아시안게임 금메달 유망주였다. 1등의 목전까지 갔던 셈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한참 놀고 싶은 때 아니던가. 그는 잠깐 일탈했지만, 그래도 다시 선수촌으로 돌아간다. 이때 코치가 체벌을 가하자 광수는 반항하며 팀을 이탈한다. 그리고 지금, 그 또렷하던 눈빛의 소년은 구민회관에서 아줌마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흐리멍텅한 중년이 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영화 <4등>은 한 소년 수영선수가 겪는 일을 통해 우리 사회 속에 내재된 폭력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그 메커니즘의 이름은 놀랍게도 ‘교육’이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하고, 성적이 떨어져도 맞아야 하고, 교칙을 위반해도 맞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맞을 때, 우린 좋았던가? 절대 아니다. 그것은 관성적인 폭력일 뿐이다.
체벌만이 폭력이 아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패배자로 살아갈 거라는 협박에 가까운 부모의 말이나 경쟁을 부추기며 모든 것을 ‘등수’로 환원하는 교육 시스템은 폭력의 숙주와도 같다. <4등>에서 광수는 왜 준호를 때리는가? 아이의 엄마가 1등을 만들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엄마는 왜 그토록 1등에 매달리는가? 아이를 최고의 수영선수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왜 최고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 사회가 1등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1등이다. 정당한 경쟁? 자아의 실현? 페어 플레이? 안타깝게도, 우린 이런 덕목을 잃은 지 오래다. 성과주의로 생사가 결정되는 체제 속에서 아이들도 예외일 순 없다. 대기만성? 아니다.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될 성 부른 나무’의 ‘떡잎’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이런 지옥이 없다. 하지만 우린 어릴 적부터 이런 사고 속에서 각성 없이 살아왔고, 그 시스템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한 명의 1등을 위해선 나머지가 모두 희생해야 한다. 그 ‘1등’을 꼭 내가 해야 한다는 건 억지다. 그럼에도 모두 억지를 부린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한 명만 행복한 세상이 된다. 그런데, 이것도 의심할 필요가 있다. 1등을 하면 정말 행복한가? <4등>에서 엄마나 코치의 간섭 없이 혼자 훈련했던 준호는 마침내 1등을 하지만 환호하지 않는다. 어떤 아이는 묻는다.
“형, 1등 하면 기분이 어때요?”
이때 준호는 거울을 본다. 거기엔 변함 없는 자기 자신이 있다. 아이는 그냥 수영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대신 준호가 행복했던 건, 코치를 피해 수영장으로 도망쳤을 때였다. 그 안에서 빛이 만들어내는 오묘하면서도 포근한 느낌 안에서, 준호는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이것은 연습이나 경기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과연 1등보다 4등이 더 값질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1등보다 ‘행복’이 더 값진 건 확실하다. 그리고 ‘등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사회에서 경쟁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1등 이외의 등수에 낙오자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준호가 4등을 할 때 6등을 한 아이도 있고 꼴등을 한 아이도 있지만 충분히 즐겼다면, 그 아이는 행복할 것이고 그 행복감은 1등보다 소중할 것이다. 그냥 즐기게 하자. 그것이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교육이며, 그들이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즐거움을 가르치기 전에 1등의 미덕과 성과주의와 경쟁의 엄연한 현실성 같은 걸 가르치지 말자. 그러면 우리보다 좀 더 행복해진 그 아이들이, 이 세상을 조금씩 바꿀 것이다.
필자: 김형석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