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공간이 사람을 바꾼다’

이제 공공디자인을 빼놓고 정책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벤치나 간판 등 거리를 채운 각종 공공시설물로부터 건축물과 도시 기반시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디자인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디자인이 그저 외양을 바꾸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생각과 정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인 까닭이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천주산. 산 중턱에 깎아지른 듯한 암벽 하나가 눈에 띈다. 푸른 가지를 드러낸 빽빽한 나무 숲 사이로 휑하게 깎여진 절벽이 조금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가까이 들어가 보면 느낌은 180도 달라진다. 흉물스럽게만 보이던 절벽 아래 에메랄드 빛 호수라니. 가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천주산의 이름을 따 ‘천주호’라 불린다.

폐채석장을 깎아낸 웅덩이에 빗물과 샘물이 고여 만들어진 ‘천주호’
화강암을 깎아 생긴 웅덩이에 빗물과 샘물이 고여 만들어진 ‘천주호’.
 
30일 찾은 이곳은 봄기운을 한껏 안은 채 더욱 청명한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좌우로 우뚝 선 50m 높이의 수직 절벽이 수면에 반사되면서 빚어내는 절경은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여기에 산을 따라 타고 내려온 계곡물이 절벽으로 떨어지면서 형성된 폭포수 소리가 운치를 더했다.

흉물스런 폐채석장이 ‘에메랄드 빛 호수’로 변신

이처럼 아름다운 조건을 가진 ‘포천아트밸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쓸쓸히 폐허로 방치됐던 폐채석장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포천시가 ‘근대산업유산 예술공간화’ 사업의 하나로 이곳의 장점을 십분 활용, 조각공원과 공연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실제로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화강암 절벽에는 과거 돌을 캤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돌을 캐고 난 뒤 드러난 웅덩이에 샘물과 빗물이 고여 만들어졌다는 자연호수 ‘천주호’에는 1급수에서만 사는 도롱뇽과 가재, 송사리 등도 찾아볼 수 있다.

아트밸리를 오르내리는 모노레일
아트밸리를 오르내리는 모노레일.
해발 340m 높이에 있는 이 호수공원까지는 모노레일을 타고 이동한다. 모노레일을 타고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왼편엔 빽빽한 나무숲, 오른편에선 버려진 화강암이 쌓여 이루어진 거대한 절벽과 마주하게 된다.


포천시 문화체육과 권혁관 계장은 “그대로 방치해둔 절벽이 바로 옆 푸른 나무숲과 비교돼 다소 흉물스러워 보이지만, 그 자체가 이곳이 ‘채석장’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시”라며, 채석장 형태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경사로 끝까지 올라가면 여러 가지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지상 3층 규모의 전시관에는 여러 미술작품이 전시돼 있고, 야외에 있는 조각공원에는 화강암을 소재로 한 돌 조각 등 여러 조각 작품이 설치돼 있다.

조각공원 부근 돌벽에는 옛 채석장 풍경을 예술적으로 재현해놓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꼭대기 쪽에 자리 잡은 ‘천주호’.

관람객 송윤선(32)씨는 “마치 외국의 유명 관광지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라며, “지난 겨울에 와보고 또 다시 왔는데 올 때마다 변하는 호수 빛깔이 예술”이라고 말했다.

파괴된 자연에서 찾아낸 ‘비경’

근대산업유산인 포천채석장은 1960년대 국가 근대화와 맞물려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국내 대표적인 화강석 생산지다. 국회의사당, 청와대, 독도의 비석에도 포천석이 쓰였다. 그 후 지난 2002년 경 채석 작업이 끝난 폐채석장은 사람의 접근이 차단된 채 몇 년간 그대로 방치돼왔다.

포천시가 이 채석장에 주목한 것도 바로 그맘때쯤이다. 시는 지역특화사업의 하나로 당초 노출된 암벽에 조각을 새겨 넣으려던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채석으로 파괴된 자연에 조각을 한다는 것은 또 한 번의 환경 파괴라는 지적에 맞닥뜨렸다.

다른 방안을 고민하던 중 깎아지른 화강석 절벽과 물이 찬 채석장 터가 만들어내는 비경에서 힌트를 얻게 됐다. 버려진 폐석산이 신비한 경관과 아름다운 조각, 그리고 예술작품 전시장으로 가득한 '예술 계곡'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포천시 아트밸리팀의 윤제 예술감독은 “숲을 걷어내고, 돌을 깎아낸 자국들 자체가 볼거리라고 생각했다”며, “채석장 아트밸리의 매력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화와 만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채석장의 변신…어떤 변화 가져왔나

과거 화강암 채취가 한창이던 때의 채석장(상). 화강암 절벽과 자연호수가 장관인 아트밸리(하).
과거 화강암 채취가 한창이던 때의 채석장(상). 화강암 절벽과 자연호수가 장관인 아트밸리(하).
폐채석장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자 사람들의 발길도 자연스레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난 10월 개장한 아트밸리는 관람객이 몰리는 휴일 하루에만 평균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찾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인근의 허브아일랜드, 국립수목원, 베어스타운 스키장 등과 엮인 관광패키지 상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미 있는 변화는 이 지역의 이미지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 포천 하면 떠오르던 군사시설과 낙후지역의 이미지를 벗고 이제 문화와 관광지의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돌을 캐내며 울리던 지독한 소음과 진동으로 골치를 앓아오던 인근 주민들의 잦은 민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문화공간은 천주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도 훌륭한 쉼터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트밸리의 폐석산 재활용 사례는 올해부터 중학교 과학교과서에도 실려 아이들에게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김창환 강원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오랜 시간 풍화와 침식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퇴색된 암벽과, 화강암의 형성과정을 볼 수 있는 절리 등은 자연과학적 증거자료로도 매우 의미 있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환경파괴, ‘원시적 복구’ 아닌 ‘치유’로 극복

포천시는 앞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1년까지 모두 53억 원을 들여 지상2층 연면적 1천200㎡ 규모의 교육전시센터 건립, 문화예술카페 조성, 상징 조형물 설치 등의 사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포천시 문화체육과 권혁관 계장은 “포천 아트밸리는 파괴된 환경을 ‘원시적 복구’가 아닌 ‘치유’의 개념으로 극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특히 산업 유산의 활용 개념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디자인공간문화과 최원영 주무관은 “앞으로 포천 아트밸리에서 조각 심포지엄, 미술전, 인디밴드 공연 등이 본격화되면 지역주민이나 관광객들에게 자연을 통한 문화 향유와 심신의 치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는 포천 폐채석장 외에도 전북 군산시 내항, 전남 신안군 염전, 대구광역시 KT&G 연초제조창, 충남 아산시 폐철도 등 근대 산업유산을 지역문화와 관광 거점으로 육성하는 사업을 지자체와 함께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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