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식품 명인 31명…조상 전래 조리·가공법 지켜

현재 전통식품 명인으로 활동 중인 사람은 31명. 명인으로 지정받으려면 전통식품 조리·가공업에 20년 이상 종사하고 조상 전래의 특별한 조리·가공법을 원형 그대로 보전하고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전남 담양의 장흥 고(高)씨 고세태가의 10대 종가. 장독대에 늘어선 5백여 개의 항아리에서 간장과 된장이 익어간다. 해마다 윤사월이면 이 항아리들은 아가리를 연 채 노란 송홧가루를 받는다. 송홧가루가 잡균을 막아주고 장맛을 좋게 해주기 때문이란다. 메주는 매년 동짓달에 국산 콩으로 쒀서 한 달쯤 발효시킨 후 죽염수에 띄워놓는다. 간을 좌우하는 죽염은 천일염을 3년 이상 자란 담양산 왕대에 넣고 소나무 장작불에 구운 것이다.

진장(陳醬)의 명인 기순도 씨의 장독대에서는 5백여 개의 항아리에서 간장과 된장이 익어간다.
진장(陳醬)의 명인 기순도 씨의 장독대에서는 5백여 개의 항아리에서 간장과 된장이 익어간다.
 
이쯤만 해도 전통 장맛의 장인이 되는 데는 손색이 없을 법하다. 하지만 지난해 이 종가의 며느리 기순도(61) 씨가 35번째로 ‘전통식품 명인’에 선정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진장(陳醬·묵은 간장에 해마다 햇간장을 부어 맛과 향을 더해 내려온 아주 진하게 된 간장)’의 내력 때문이다.

“1년이 지난 간장을 떠서 별도의 항아리에 보관하는데, 이걸 시장(始醬)이라고 합니다. 시장을 5년 이상 숙성시키면 진장이 됩니다. 대대로 좋은 향과 맛을 위해 진장을 귀한 자식 돌보듯 돌보니 약장(藥醬)이라고도 하죠.”

기 씨가 진장 항아리의 뚜껑을 열자 진한 먹물 같은 간장이 보인다. 항아리 바닥에는 수백 년 동안 가라앉은 소금 결정체가 두껍게 굳어져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해마다 햇간장을 덧붓는데도 염도 차이가 거의 없고 맛과 향이 진한 게 진장의 특징이다.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해온 장으로, 고 씨 종가는 3백60여 년간 진장 항아리를 4, 5개 보존해왔다. 이런 진장은 간장의 명가라는 일본 기코망 간장에서 건강에 좋은 ‘초고압 간장’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할 만큼 관심이 높다.

전통식품 명인 31명… 조상 전래 조리·가공법 지켜

이처럼 기 씨가 대대로 전수받은 진장의 내력만 보아도 ‘전통식품 명인’이 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농수산물가공산업육성법 제6조에 따라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받으려면 전통식품 조리·가공업에 20년 이상 종사하고 조상 전래의 특별한 조리·가공법을 원형 그대로 보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몇 년 전부터는 명인으로부터 전수 교육을 받은 후 10년 이상 종사한 경우에도 명인 신청을 할 수 있도록 조건이 조금 완화됐다. 명인의 자손이나 전수자에게도 길을 터준 셈이다. 명인이 되면 ‘대한민국 식품명인’이라는 로고를 사용할 수 있고, 국내외 홍보 행사를 일부 지원받는다. 대신 매년 ‘명인 활동 보고서’를 제출해 국산 재료를 쓰는지 출처를 밝혀야 한다.

왼쪽부터 기순도 명인의 된장, 최봉석 명인의 갈골산자, 조영귀 명인의 송화백일주, 홍쌍리 명인의 매실액, 양대수 명인의 추성주.
왼쪽부터 기순도 명인의 된장, 최봉석 명인의 갈골산자, 조영귀 명인의 송화백일주, 홍쌍리 명인의 매실액, 양대수 명인의 추성주.
  
현재 전통식품 명인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31명. 조선 중기 명승인 진묵대사가 인근의 자생 약초로 빚어 마신 사찰 법주인 송화백일주를 전승한 조영귀(61) 씨가 1994년 명인 1호로 지정된 이래 지금까지 15년 동안 35명이 지정됐다. 그 사이 4명이 작고해 지정이 해제되고 현재 활동 중인 명인 31명 중에는 2명이 국가무형문화재, 8명이 지방무형문화재를 겸한다.

해외서도 뜨거운 반응…수출 품목 점차 늘어

전통식품 명인 중에는 주류 부문이 16명, 식품 부문이 15명이다. 단일 지역으로는 담양에서 가장 많은 4명이 각각 창평쌀엿, 추성주, 엿강정, 진장 품목으로 명인에 지정됐으며, 전주와 하동 각각 3명, 안동 2명 순이다.   

명인들이 빚는 전통주 중에는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산소곡주, 안동소주, 문배주, 송순주가 포함되며, 일반인에게는 조금 생소한 계룡백일주, 옥로주, 계명주, 가야곡왕주,  김천과하주, 추성주, 옥선주 등이 있다. 전통식품 명인 제도 시행 초기에는 주로 전통주 명인들이 선정되다 차츰 식품과 차류의 명인들도 지정됐다.

굽이도는 섬진강 자락을 끼고 있어 경치 좋은 관광지로도 유명한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의 홍쌍리(67) 씨는 매실농축액 명인이다. 강릉 갈골마을의 옛 이름을 붙인 갈골산자는 강정류이면서도 ‘속빈 강정’과 달리 속이 실하면서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찹쌀 한과로, 최봉석(65) 명인의 솜씨다. 파평 윤씨 가문의 종부 오희숙(55) 씨는 문중 행사 때 빠지지 않는 찹쌀 부각(여러 장의 김을 찹쌀풀로 붙여 말렸다가 튀긴 반찬) 덕분에 명인이 됐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남편 윤형묵(60) 씨가 10여 년 전 어느 외국 바이어에게 부각을 선물했다가 찬탄과 함께 상품화 제안을 받으면서 ‘오희숙 전통 부각’이라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가장 최근인 2008년 8월에 진장의 명인 기순도 씨와 함께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된 서양원 (77·한국제다 대표) 씨는 60년 가까이 녹차산업에 종사해왔다. 2002년 국제명차대회에서 가루차 등 3개 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한 서 씨가 지난해 명인으로 지정받는 데 기여한 품목은 황차(黃茶)와 말차(抹茶). 황차는 녹차와 홍차의 중간 정도로 발효시켜 만든 반(半) 발효차이며 말차는 찻잎을 쪄서 건조해 만든 가루차로, 두 가지 모두 찻잎의 신선도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서 씨는 전남 장성과 영암 등에 33만여 제곱미터의 차밭을 직영하면서 이 중 4만9천여 제곱미터의 땅엔 유기농으로 차를 재배하고 있다.

전통식품 명인들의 ‘명품’은 해외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문배주, 전주 이강주, 옥로주, 추성주, 부각, 진장, 야생작설차 등이 이미 수출 길을 텄고, 다른 품목들도 수출을 타진하고 있다.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전통식품을 알릴 명인들의 손길은 더 바빠질 전망이다.

■ 한국식품명인협회 양대수 회장
“후계자 교육 위한 지원 절실”

양대수 회장
 전통식품 명인들의 모임인 (사)한국식품명인협회 회장이자 전남 담양군의회 의장인 양대수(53) 회장은 그 자신이 명인이기도 하다. 양 회장이 추성주(秋成酒) 명인으로 지정받은 때는 2000년. 가사문학과 선비문화의 산실인 담양에서 나고 자라 추성 고을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추성주 제조 기법을 전수받았다. 쌀과 13가지 한약재로 빚은 추성주는 은둔하던 선비들이 즐긴 술이다. 예인의 고장에서 선비 기풍을 이어받은 양 회장이지만 명인 제도에 대해서는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명인이 되면 ‘명예’밖에는 별로 도움이 되는 게 없어요. 그렇게 까다롭게 심사를 해서 명인으로 지정했다면, 무형문화재처럼 전수자 교육을 위해 매달 금전 지원을 해준다든가 하는 실질적인 도움이 있어야죠. 원료도 까다롭게 감시해야겠지만 원가가 높아서 가격경쟁력이 없는 만큼 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제품이라고 대국민 홍보를 잘해줬으면 합니다.”

양 회장은 정부 차원에서 전체 명인들의 홍보교육관을 건립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대(代)에서 끝나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정부 차원에서 전통식품을 대대로 전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홍보교육관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게 우리 명인들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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