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성원기자]지난 1월15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스산한 겨울바람을 밀어내며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한 중년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던 가족과 친지들은 한달음에 달려가 그를 얼싸안았다.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부인이 건네준 두부를 한입 베어물었다. 사내는 입을 굳게 닫은 채 구치소 정문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잠시 눈을 번뜩이던 그는 자신을 둘러싼 카메라를 향해 조용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검찰 공명심의 피해자다."
 
변양호.
 
'천재관료', '미래의 장관'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과 '현대차 로비 사건'으로 감옥에 몸이 묶이고 만다.
 
그는 지난 2003년 재정경제부(옛 기획재정부) 금융정책국장을 지낼 당시 미국계 사모펀드(PEF)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헐값에 넘겼다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었다.
 
여기에 현대차그룹의 계열사 채무탕감 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겹치면서 오랫동안 재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법원은 외환은행 헐값 매각사건 1심 재판에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뇌물수수 혐의로 2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그는 이듬해 1월 상고심에서 무죄취지의 선고를 받고 전격 석방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양호,하면 '현대차'보다는 '외환은행'을 먼저 떠올린다. 외환은행 헐값매각 재판이 공직사회에 남긴 후유증이 워낙에 강렬했기 때문이다.
 
'관료가 자신의 소신에 따라 국익을 위해 '정책적 판단'을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될 수 있다!'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변양호 신드롬'의 실체다.
 
'변양호 신드롬'은 이후 외환은행을 둘러싼 인수합병 일지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영국계 HSBC은행이 외환은행을 인수하려했지만 결국 무산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HSBC은행은 외환은행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금융당국은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이라는 이유로 인수심사를 차일피일 미뤄왔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인수가격에 이견이 있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하지만 금융당국도 미온적인 태도도 일관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외환은행은 아직까지 새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최근 비씨카드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보고펀드의 공동대표 변양호를 다시 끄집어낸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대규모 파생상품 손실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직무정지' 징계를 받은 황영기 KB금융 회장을 놓고 이른바 '황영기 신드롬'이란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징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변양호 신드롬'을 언급하며 "금융기관 임원 사이에 책임 회피 풍토가 생겨나면서 금융산업 발전이 더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년 전 내려진 투자결정이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천재지변'을 겪으며 엄청난 규모의 손실로 돌아온 것을 놓고 사후에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단위는 다르지만, 어쨌든 '선의'를 갖고 결단을 내렸다는 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황 회장 역시 대규모 손실을 예상하고 투자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터다.
 
당사자인 황 회장측도 이같은 논리를 내세우며 감독당국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하지만 결국 칼자루를 쥔 금감원은 예상대로 '직무정지'를 결정했고, 경우에 따라선 법정에서 시비를 가릴 수도 있게 됐다.
 
금융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릴지, 또 황 회장이 원치 않는 결과를 얻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 이번 사건이 국내 금융기관 임원들의 의사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은 확실해보인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를 명확히 가리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감독당국이 내린 결정은 앞으로 발생할 비슷한 사안의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황 회장이 변 대표처럼 금융당국을 향해 '일갈'할 수 있을지, 아니면 실패한 금융인으로 전락할지 지켜봐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뉴스토마토 박성원 기자 want@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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