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90년] 대한민국의 뿌리를 다시 생각한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27년의 의미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년이자 그 모태가 된 3·1운동 90년,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의거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땀과 피와 희생을 통해 ‘쟁취’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생각해보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다져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지도자들이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있던 임시정부를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한 것이다.

“Where are you from?”
“I’m from Korea.”
외국에 나가면 으레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이다.

2000년대를 사는 우리 국민 가운데“I’m from Korea”라고 대답하는 데 주저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바로 대한민국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대한민국에 대한 인지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으로 돌아가 보자.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낯선 외국인이 일제강점기 대한국인(大韓國人)에게 말을 걸어왔다.

“Where are you from?”
“….”

나라 잃은 설움을 당해 보지 않고 그 심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자신의 내셔널리티(Nationality)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주는 참담함은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올해로 꼭 90주년이 됐다. 임시정부 수립을 우리가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모태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전 우리나라 국호는‘대한제국’이었다. 대한제국은 제국(帝國), 즉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 국가였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던 시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나라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제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를 원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칭을 지을 때 민국(民國), 즉 국민의 나라라고 지은 데서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독립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명칭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숭모회 등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온 안중근 의사의 친필유묵 ‘獨立’(독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였다. 우리 겨레는 독립운동을 통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민주권국가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만약 임시정부가 조선왕조나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을 전신으로 삼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임금’이나 ‘황제’를 모시고 사는, 피선거권은 물론 참정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백성’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채택했던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였고,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계승됐다.

필연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1918년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창된 민족자결주의는 세계의 억압받는 민족들에게 자극제가 됐다. 일본의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던 우리 민족은 한민족의 문제가 국제사회에 상정되고 겨레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할 필요를 느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비롯해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네루가 옥중에서 딸에게 쓴 <세계사 편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상쾌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조선은 일본의 총칼 아래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정신을 무참하게 짓밟혔다. 일본은 처음 얼마 동안 근대적인 개혁을 실시했으나, 곧이어 나쁜 속셈을 드러냈고 조선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계속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19년의 3·1운동을 비롯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맨주먹으로 적에게 저항하며 용감하게 투쟁했다.

3·1운동은 조선 사람들이 단결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으려다, 일본 경찰에 잡혀 수없이 죽어가고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뜻깊은 독립운동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 일본인에 억눌린 조선의 역사는 실로 쓰라리고 어두운 암흑이었다. 조선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곧장 대학을 나온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3·1운동이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천명했다면 그 다음 과제는 당연히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는 우리 겨레의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지도자들이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있던 임시정부를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한 것이다.

임시정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영토 밖에서 임시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그래서 나라를 되찾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로, 그리고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은 국회가 된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간 정부 조직을 유지한 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는 식민지 역사가 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고난의 이동, 변치 않은 조국 독립의 꿈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면 대부분 상하이(上海)에 있었다고 기억하는 국민이 많다. 하지만 광복 직전 임시정부는 충칭(重慶)에서 5년을 보냈다. 상하이에서 13년, 그리고 충칭에서 5년을 뺀 나머지 기간은 길고도 힘든 이동 시기였다. 이 시기는 하루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고난의 시기였다고 한다. 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동할 수밖에 없었을까?

바로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윤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 이후 긴급히 항저우(杭州)로 피신했다. 이후 중국 내륙 지방인 전장(鎭江)에 자리 잡게 되고, 주요 요인들은 중국정부가 위치한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그해 11월 창사(長沙)로 이동했고, 1938년 다시 광저우(廣州)로, 그해 10월에는 버스와 배를 이용해 다시 류저우(柳州)에 도착했다. 1939년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류저우를 떠나 치장을 거쳐 충칭으로 향한다.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도착하기까지 8년이 넘는 기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난과 시련의 시간이었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 일부다.

“기차에서 사탕수수 밭까지는 불과 몇 걸음 사이였지만 하늘에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총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기차에서 내려 밭까지 뛰어가 몸을 숨겼는지 모르겠다. 건장한 청년 10여 명이 배에서 내려 밧줄을 배에 묶고는 강변을 따라 그 밧줄을 끌고 올라갔다.”

독립운동가들은 시련을 이겨내고 끝까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 특히 임시정부 이동 기간에 장차 광복군으로 발전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만들고 시가행진과 문화 공연 등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지친 중국인들에게 힘을 불어넣기도 했다.

임시정부 좌우 대통합 달성이 주는 교훈

식민지 해방사에서 정부 조직으로 27년이 넘도록 해방운동을 전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기념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를 채택했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크나큰 교훈을 주고 있다. 좌우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 끝에 충칭에서 좌우통합 정부의 결실을 보았다는 점에서다.

민족문제연구소 신명식 기획이사는 “임시정부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좌우통합 정부를 구성했다는 점”이라며 “서로 힘을 합하기 어려워 보였던 좌우 진영에서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손을 잡았다는 것은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에 비춰 큰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좌우로 나뉘었던 독립운동 진영의 대통합을 달성한 사실은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Where are you from?”
“I’m from Korea.”
“South? or North?”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 되도록 대한국인(大韓國人)이 외국인에게 내셔널리티를 설명하기 위해 꼬리표처럼 “South? or North?”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받아야 하는 작금의 현실을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시정부가 꿈꿨던 진정한 독립은 여전히 미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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