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90년]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임시정부 숨결찾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이화학술원과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여정을 되짚어보는 뜻깊은 탐방을 했다.
조상들의 흔적을 되짚어본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탐방단에는 독립유공자 후손 10명이 합류했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지 90돌이 되는 해다. 1945년 11월까지 중국에 머물렀던 임시정부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그해 5월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항저우, 창사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이르러서야 막을 내린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지난 3월 23일 탐방단을 태운 비행기가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임시정부 청사까지 가는 동안 버스에서 본 상하이는 하나의 커다란 공사장이었다.

임시정부 청사가 자리한 곳은 열강 세력이 충돌했던 19세기 말 옛 프랑스 조계에 속하던 노만구(盧灣區) 마당로(馬當路) 보경리(普慶里) 4호. 주변의 고층 건물과 대비되는 낡은 3층짜리 옛 건물이다. 1, 2층에는 책상, 의자 등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건들이 잘 배치돼 있었다. 3층 자료실에는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자료와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낡은 외관에 비해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지만 좁은 공간 탓에 충실한 내용을 담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청사를 돌아본 유공자 후손들은 “더부살이 신세였다고 하지만 정부청사라고 하기에는 비좁고 초라한 공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유적지로 보존된 임시정부 청사 보며 뿌듯

탐방단은 더 나아가 청사의 계속 보존 여부를 걱정했다. 독립유공자 후손 이경태(27) 씨는 “언젠가는 개발논리에 밀려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거처가 있던 청사 바로 옆 영경방 터에는 이미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중국 항저우시 임시정부 호변촌 청사내 응접실.
다음 날 탐방단은 항저우로 이동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가 처음 도착한 기착지였다. 임시정부는 인화로(仁和路) 22호와 호변촌(湖邊村) 23호에 청사를 뒀다. 인화로의 청사는 개인 소유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항저우시가 호변촌 청사를 2007년 복원해 임시정부기념관으로 꾸몄다는 사실은 탐방단에게 위안거리였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자싱(嘉興), 난징 등을 오가며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싱에 피난처를 두고 있었다.

자싱의 매만가(梅灣街) 76호에 있는 백범의 피난처에 도착한 탐방단은 침실 바닥에 난 비상통로를 보는 순간 숙연해졌다. 통로는 뒷문을 거쳐 시난호(西南湖)와 연결됐다. 백범은 일제의 수색이 있을 때면 이 통로를 거쳐 뒷문 밖에 매어둔 배를 타고 피신했다.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나룻배를 보면서 또 다른 후손 최민석(23) 씨는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으로 생활했을 요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다”고 말했다.

여기서 100m가량 떨어진 일휘교(日暉橋) 17호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살았던 집이 복원돼 저장(浙江)성의 성(省)급 문화재로 지정돼 있었다.

1935년 11월 항저우를 떠난 임시정부 요인들은 전장을 거쳐 내륙의 창사로 이동했다. 창사에서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후손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백범이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에게 피격당한 남목청(楠木廳)의 조선혁명당 본부가 창사시 주도로 복원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창사의 악록(岳麓)산에는 백범이 수술을 받은 뒤 요양한 옛 가옥이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본군이 중국 내륙으로 밀고 들어오자 다시 광저우로, 류저우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시정부가 두 도시에 머문 기간이 길지 않아서인지 제대로 남아 있는 유적이 많지 않았다.

광저우에서 탐방단은 황푸(黃)군관학교와 중산(中山)대학을 방문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독립에 대한 일념으로 문무를 닦은 곳이다. 임시정부가 1938년 11월부터 1939년 5월까지 머무른 류저우에는 당시 호텔로 사용된 낙군사(樂群社)라는 건물이 ‘임정항일투쟁활동진열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임시정부는 치장(江)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도착했다. 임정이 충칭시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 연화지(蓮花池) 청사는 1995년 복원됐다. 양옥 다섯 채인 이 청사는 ‘정부청사’에 걸맞게 번듯했다. 탐방단은 “깔끔하게 정돈된 청사를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입을 모았다.

<백범일지> 저술한 오사야항 청사는 철거 직전

그러나 충칭에서도 오사야항(吳師爺巷) 청사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했다. 이곳은 충칭의 세 번째 청사로, 재개발로 곧 헐릴 위기에 처해 있다. 백범 선생은 여기에 머무는 동안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했다.

충칭 도심의 한국광복군총사령부는 이미 개인 소유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광복군 출신인 외할아버지의 자취를 찾아온 윤지애(22) 씨는 “사유지라서 들어가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주일 동안 임시정부 유적을 둘러보며 탐방단은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중국 지방자치단체가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원과 유지 노력을 기울인 곳에선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을 나타냈다. 반면 곧 사라질 유적 앞에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상의 발자취를 돌아본 강정민(27) 씨는 “모든 유적이 잘 복원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인 것 같다”면서 “복원된 곳에라도 한국인이 많이 방문해 그곳의 중요성을 중국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렸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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