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애, 올 초 컷오프 탈락 후 곧바로 역전 우승
양용은, 좌절과 도전 끝에 마침내 PGA 정상 등극

“저도 놀랐어요. 1, 2라운드 성적이 좋지 않아 우승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욕심을 버리고 경기에 집중한 덕에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 3월 8일 싱가포르에서 끝난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HSBC위민스챔피언스에서 극적인 역전 우승을 거둔 후 금의환향한 신지애는 예상치 못한 우승에 기쁨이 더 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 2라운드에서 세계 톱랭커다운 플레이를 펼치지 못해 우승은 고사하고 ‘톱10’에도 들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1, 2라운드를 마치고 화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마음을 비우자고 스스로 다짐했죠.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정말 신기하게도 경기가 잘 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최종 라운드에서 처음 4개 홀 연속 버디를 잡아 저도 많이 놀랐어요. 지금은 무척 행복해요.”

 

 

사실 3주 전만 해도 신지애는 우승을 꿈꿀 입장이 못 됐다. 하와이에서 열린 개막전인 SBS오픈에서 어처구니없는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신지애는 2라운드 도중 16번 홀에서 1m 정도 거리의 버디 퍼트를 성공하지 못했다. 퍼터가 열린 채 맞아 볼은 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평상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신지애는 다음 17번 홀에서 드라이버샷을 감아친 탓에 볼을 덤불 속으로 보내고 말았다. 볼을 찾지 못해 전동카트를 타고 다시 티그라운드로 돌아간 신지애는 결국 더블보기로 홀아웃했고, 후반 4번 홀에서는 25m 거리의 버디 기회에서 4퍼트로 두 번째 더블보기를 범했다.

“괜찮아요. 30개 대회 가운데 이제 하나가 끝났을 뿐인데요.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해요. 다음 시합 준비를 잘해서 좋은 결과를 낼 거예요.”

2라운드 후반부터 45개 홀에서 보기없이 버디만 14개

하와이 대회장에서 만난 신지애는 예선 탈락 후 짧은 소감을 밝히고 이어폰을 낀 채 음악만 들었다. 그리고 박세리, 최나연, 양영아 등 동료들과 호놀룰루의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쓰린 속을 달랬다. 서울로 돌아온 신지애는 다시 개막전 예선 탈락과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귀국 직후 신지애는 “한순간의 실수로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고, 겸손해지라는 하나님의 뜻인 것 같다”며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신지애는 곧바로 자신이 골프를 익힌 전남 담양과 영광에서 샷을 가다듬었다. 신지애와 함께 연습한 이일희 프로는 “지애가 연습 후 60~70개의 골프볼에 사인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며 걱정했다. 그러나 신지애는 강했다.

악천후로 파행 운영된 HSBC위민스챔피언스에서 거짓말 같은 역전 우승을 거뒀다. 2라운드 전반까지만 해도 신지애는 슬럼프를 우려할 정도의 허술한 플레이를 계속했다. 첫 홀인 10번 홀(파4)에서 두 번째 샷을 벙커에 넣었고 한 번에 탈출하지 못해 트리플보기로 경기를 시작해야 했다. 하와이에서 보여준 난맥상을 재현하는 듯했다. 그러나 2라운드 후반부터 180도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신지애는 최종 라운드 마지막 18번 홀까지 무려 45개 홀에서 보기는 단 한 개도 없이 버디만 14개를 잡아내 우승스코어를 만들었다.

귀국 후 국내에 머물며 다음 주 멕시코대회를 준비 중인 신지애는 “개막전에서 당한 예선탈락이 약이 됐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켜서 기쁘다. 주변에서 슬럼프를 걱정해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마음은 다 없어졌다”고 말했다.

신지애의 승리는 또 다른 값진 승리를 불렀다.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가든스의 PGA내셔널 챔피언코스에서 열린 미국 PGA투어 혼다클래식에서 ‘야생마’ 양용은이 불굴의 투지로 정상에 선 것. 양용은은 3라운드를 선두로 끝낸 뒤 인터넷을 통해 신지애의 우승 소식을 접했다. “나는 신지애처럼 뒤져 있는 상태도 아니고 선두다. 더 잘할 수 있다.”

 

미국 PGA투어 혼다클래식에서 불굴의 투지로 정상에 오른 양용은.

 

최종 라운드를 앞둔 양용은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양용은의 다짐처럼 경기는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5번 홀의 줄버디 등 14번 홀까지 버디 5개를 잡아내며 4타차 선두를 달리던 양용은은 ‘베어트랩’으로 불리는 15~17번 홀에서 보기 2개를 범해 가슴을 졸여야 했다. 파3홀인 15번 홀과 17번 홀에서 티샷을 벙커에 빠뜨리며 2타를 잃은 양용은은 추격자 롤린스가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아 1타차로 쫓겨야 했다.

“15만원짜리 월세 살면서도 꿈 잃지 않았다”

운명의 18번 홀(파5)에서 양용은은 100야드 남짓 거리의 세 번째 샷을 날린 후 클럽을 놓아버릴 정도로 긴장했다. 볼은 핀 15m 지점에 떨어졌고 그린으로 향하는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볼과 홀 사이를 오가며 퍼팅라인을 읽은 양용은은 다행히 첫 번째 퍼트를 홀 30㎝ 지점에 붙일 수 있었고 두 번째 퍼트는 홀 중앙으로 떨어졌다.

“18번 홀의 퍼팅 거리가 제 인생의 길이만큼 아득하게 느껴졌어요. 속으로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 ‘할 수 있다’고 수없이 되뇌며 볼과 홀 사이를 왔다 갔다 했죠.”

양용은의 혼다클래식 우승이 값진 이유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위해 도전정신을 발휘했다는 데 있다. 제주 관광산업고 출신인 양용은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한때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한 바 있다. 아마추어 시절에도 국가대표 등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로 입문 후 국내무대에서 뛸 때 양용은의 두 눈엔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노력은 하는데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린다는 답답함만이 가득했다.

불운하던 양용은의 골프 인생에 희망의 빛이 들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이었다. 일본 프로골프투어에서 정상에 오르며 생활의 안정을 꾀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2006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유러피언투어 개막전인 HSBC챔피언스에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를 누르고 우승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대회에서 우승한 뒤 마스터스에도 나가는 등 제 꿈을 이룬 것 같아요. 하지만 목표를 이루고 난 뒤에는 골프에 대한 열정이 다소 식었고 샷이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힘들었던 게 사실이에요.”

양용은은 HSBC챔피언스 우승으로 얻은 풀시드를 갖고 유러피언투어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까다로운 코스 세팅으로 예선 탈락을 반복하며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는 드로성 구질을 구사하는 양용은은 좁은 페어웨이와 깊은 러프로 무장한 유러피언투어에서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왕이면 예선 탈락을 해도 최고의 무대에서 하자.”

다시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선 양용은은 과감하게 미국 PGA투어 Q스쿨을 노크했다. 2007년 12월 6위로 Q스쿨을 통과해 PGA투어 정회원이 됐지만 미국의 다양한 코스에 적응하지 못해 상금랭킹 157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다시 Q스쿨로 갈지를 고민할 때 선배 최경주가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에 있는 양용은의 집을 찾았다. 최경주는 “너 자신을 믿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힘을 얻은 양용은은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Q스쿨을 공동 18위로 통과했다. 그리고 정확히 석 달 뒤 혼다클래식 우승으로 인생역전의 샷을 날렸다. 경기도 기흥의 15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그저 포기하지 않고 꿈을 쫓다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골프채를 붙잡고 늘어졌다”던 양용은의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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